/ 이 작품들을 감상해보십시오 - 서고
단편소설 《끝나지 않은 항로》 (12)
주체108(2019)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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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규성총국장의 안해 리정희는 이밤에도 또다시 사진첩을 꺼내들었다.
  이제는 비행승무안내원의 정복을 벗은지도 어언 수십년…
  했어도 오늘까지 리정희는 마음속으로 꿈많던 처녀시절의 비행승무안내원으로 살고있었다.
  《려객기는 활주로를 떠나서 생각할수 없어요. 그건 활주로가 없인 려객기가 날아오르지도 못할뿐아니라 설사 날아올랐다 해도 다시 내려앉을수 없기때문이 아닐가요.
  우리 안해들은 늘 자기들이 남편들의 활주로라는 긍지를 안고 살지요.》
  눈에 익고 손에 설었던 작은 호미를 쥐고 민항가족들과 함께 처음 부업지에 김매러 갔던 그날에 연하디연한 자기의 손바닥에 불거진 물집을 호호 불어주며 다정스레 말하던 부업반책임자의 말을 리정희는 지금도 기억하고있었다.
  얼마나 멋진 말이였던가. 그날 리정희는 가래삽같은 손바닥에 두터운 장알이 박힌, 농촌아낙네와 별로 다를바 없는 나이지숙한 그를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세월은 살같이 흘렀다.
  하늘길 저 멀리로 떠나보낸 남편을 기다려 날이 새도록 아래목에 놓아둔 밥그릇의 뚜껑을 서운히 열어보며 기다리는것이 곧 일이였던 신혼의 긴긴밤도 두 자식을 키우느라 손 마를새없이 오만자루의 품을 바쳐야 하는 모성의 의무앞에 언뜻 자리를 내여주었다. 그 시절에는 언제 남편의 따뜻한 품을 생각할새도 없었고 적적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헌데 누가 말했던가? 세월은 반복이라고…
  나래굳힌 어린 새가 둥지를 털고 어미품을 훌 날아가버리듯 다 자란 자식들이 하나, 둘 시내에 자기 살림을 펴고 뎅그런 방안에 또다시 홀로 쓸쓸히 남았다.
  민항가족녀인들의 말을 빈다면 《텅 빈 활주로》가 된셈이다.
  또다시 남편에게 정이 쏠렸다. 아마도 녀인의 생은 정을 떠나서는, 사랑을 쏟지 않고서는 못사는 인생인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은 너무도 무정했다. 비행사에서 지도일군으로, 항공총국장으로의 눈부신 성장의 길은 아마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부부의 정이라는 개념과 멀어지는것을 순리로 하는것인지.…
  그래도 비행사시절에는 사흘에 한번, 나흘에 한번 가물에 콩나듯 집이라고 찾아들어오군 하였으나 총국장이 된 후로는 청사안에 아예 딴살림을 편것 같았다. 《텅빈 활주로》에 애틋한 추억만을 자취로 남겨놓고…
  첫장을 펼쳐드니 멋진 비행승무안내원복을 입은 물찬 제비같은 처녀가 정희를 바라보며 방싯이 웃음을 짓는다.
  그윽한 옹달샘마냥 크고 까만 눈동자, 웃을적마다 곱게 패여들군 하던 보조개, 함치르르 윤기가 흐르는 까만머리…
  그옆에는 푸른 하늘을 형상한 둥글모에 새의 날개를 부각한 민항군표를 단 잘나게 생긴 비행사청년이 무뚝뚝한 기색을 하고 얼굴을 기울사하게 정희쪽으로 붙이고 나란히 서있다.
  끝없는 정회가 녀인의 가슴속에 밀물처럼 흘러들었다.
  …이른아침 뭇새들의 번거로운 지저귐도, 깊은 산골의 여울물소리도 결코 비행기승무안내원처녀들의 재깔거림에는 비기지 못하리라. 그들의 화제에 자주 오르는 승조장 강규성은 정말로 뭇처녀들의 시새움을 자아낼만 한 호남아였다. 장대같이 늘씬한 키에 중량급경기선수처럼 쩍 벌어진 어깨며 비행장처럼 훤한 얼굴에 큼직큼직하게 박힌 눈, 코, 입…
  처녀라면 누구나 처음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울렁거릴 정도로 잘난 사내.
  리정희는 누구보다 그를 잘 알았다.
  바로 처녀자신이 그 비행기의 승무안내원이였던것이다.
  십여년간의 비행년한에 단 한번의 실수도 몰랐다는 책임성높은 그 총각비행사에 대한 처녀들의 평가는 예상외로 랭혹했다.
  고박하기보다는 못났다는것이다.
  영화의 평범한 장면에도 곧잘 감동되여 헤픈 눈물을 흘리군 하던, 어느 장난꾸러기총각의 정확한 표현을 빈다면 《울음주머니》라고 불리우던 마음여린 승무안내원처녀들이였다. 그런 자기들이 그토록 잘난 총각의 금새를 너무나도 낮게 매긴 그 랭혹한 《결정》에 스스로 놀라 저도 모르게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가랑잎 굴러가는것을 보고도 왜서인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오던 시절… 제대명령을 받기 며칠전까지만 해도 리정희는 처녀시절의 멋진 꿈과 웃음을 실어나르던 사랑스러운 려객기와 정든 비행장을 영영 작별하리라고 생각 못했었다. 하지만 일이란 언제나 자기가 바란다고 해서 되는것이 아닌 법이다.
  드디여 제대명령을 받았다.
  책임승조장 강규성이 그를 찾았다.
  《저녁에 좀 만나기요.》
  《왜 말입니까?》
  놀라움에 가까운 처녀의 목소리.
  《저녁 아홉시에 비행장앞에서 기다리겠소. 늦지 마오.》
  처녀의 질문을 거의 무시한채 강규성은 무뚝뚝하게 시간을 강조했다.
  수년간이나 한비행기에 타면서도 나눈 이야기란 기껏해야 한두마디의 인사말뿐이였던 과묵하기 이를데 없는 강규성이 처녀와 만나기를 청했다는것자체가 오이넝쿨에서 수박을 딴것만치나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인츰 리해가 갔다.
  아무리 뚝박새라 해도 그 역시 목석이 아닌만큼 수년간이나 한 비행기를 타온 사이에 모르쇠를 할수 없을것이다.
  벌써 처녀에게는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며 동무들이 안겨준 적지 않은 작별기념품들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강규성승조장이야말로 지각생인셈이다.
  정각 아홉시에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가지 마오. 내 일생의 길동무가 되여주오.》
  그 어떤 미사려구도 없는 무뚝뚝한 어조였다.
  처녀는 씁쓸히 웃었다. 발끝으로 오벼놓은 땅바닥에 십자표식같기도 하고 라틴어자모같기도 한 알지 못할 부호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불시착륙인가요?》
  《마음대로 생각하오. 그러나 이번만은 아니요. 난 하늘길로 사람들을 싣고 나는 려객기비행사요. 동무야 나의 이 심정을 잘 알지 않소? 자신의 한생은 인민을 위한 한생이라고 하신 우리 장군님의 뜻을 하늘에 펼치는 비행사! 난 저 푸른 하늘을 떠나선 못사오.》
  강규성은 정희의 손을 꽉 잡았다. 어찌된 일인지 집게처럼 으스러지게 틀어쥔 그의 손아귀가 조금도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쉼없이 살랑이던 백양나무의 설레임소리도 잦아들고 우짖던 새들도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는지 사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마치 그들에게 무엇이든 속삭이라는듯이…
  달빛이 교교히 내리깔리는 교외길을 걸어 그들은 읍거리 사진관으로 갔다. 밤늦어 두드리는 문소리에 신경이 살아 무엇이라 혼자소리로 옹알거리며 나왔던 사진관녀인이 민항의 정복을 입은 두 청춘남녀를 보자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붙어서라요. 원참, 약혼사진을 찍는다면서 처음 만난 처녀총각들같이 내우는 무슨…》
  환한 조명등을 켜고 렌즈의 초점을 맞추던 사진사녀인이 선하품을 해대며 지청구를 한다.
  《좀더 가까이… 좋아요. 웃으세요. 야참, 비행사동문 웃을줄도 모르세요? 아유― 저런 뚝박새라구야.》
  사진사녀인이 답답해난듯 손을 내저었다. 녀인의 닥달에 못이겨 두 사람이 웃었다.
  그 순간 사진사녀인이 샤타를 눌렀다.
  《원, 비행사동문 또 먼저 입을 다물면 어떻게 해요?》
  비명 비슷이 울리던 사진사녀인의 핀잔소리…
  바로 그런 우스운 추억이 깃든 약혼기념사진이였다.
  리정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웃고나서 사진첩의 다음장들을 한장한장 번져나갔다. 언제한번 큰소리로 웃어본적이라고는 없는 남편, 결혼식날에조차 웃으며 찍은 사진이 없는 그 뚝박새.
  문득 리정희의 손길이 멈추어섰다. 이 사진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남편이 환히 웃고있는것이다. 그옆에 온통 눈천지가 된 스키복을 입고 웃음을 터치는 녀인은 분명 자기, 리정희이다.
  리정희는 불시에 뜨거운것이 쿡 솟구치는 바람에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갔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손수 사진기를 드시고 찍어주신 부부사진이였다. 언제였던가, 이 사진을 찍었던것이…
  리정희가 명상에 잠기듯 깊은 추억에 빠져있는데 별안간 전화종소리가 울려왔다. 무심히 송수화기를 들던 녀인은 뜻밖에 흘러나오는 귀선 목소리에 무춤 굳어져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총국장동지 아주머니십니까? 저… 여긴 중앙병원입니다.》
  리정희에게는 그 다음말이 더 들려오지 않았다.
  세찬 충격이 그를 그 자리에 쓰러뜨렸던것이다.